"더이상 속도의 노예가 되지 말자"…느리게 살기 붐 패스트푸드 거부 전세계 확산…자동차 안타는 운동도
▲ 봄비가 내리는 경기도 벽제의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주말농장에서 회원 가족들이 자기 밭을 가꾸고 있다.최근 주말이면 바쁜 생활을 잠시 접고 자연으로 돌아가 삶의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흐트러지고 지쳐 있다. 과학기술 문명의 급진전, 산업화와 도시화는 인간의 생활을 더욱 바쁘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모든 감각이 밖으로 향하면서 어느새 잃어버린 ‘나’를 되찾을 방법은 없을까?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 편집자 )
지난달 30일 오후 2시 경기도 벽제 시립묘지 맞은편의 낮은 비탈. 서울 도심에서 구파발로 이어지는 차량들의 빡빡한 퇴근 행렬을 빠져나온지 30분 쯤 지났을까? 창밖으로 계속되던 마을 모습이 끊어지고 한가로운 농촌 풍경이 펼쳐졌다. 개신교 수도공동체 동광원이 자리잡은 이 곳에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지난해 주말 농장을 마련했다. 한 가족이 5평 단위로 땅을 마련해서 주말을 이용해서 직접 각종 야채와 과일, 곡물을 기르도록 하고 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아랑곳 않고, 대여섯 가족들이 삽과 가래로 땅을 고르고 반으로 쪼갠 감자를 땅에 묻고 있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김영락 목사(50)가 잠시 모닥불 근처로 회원들을 불러 모았다. “힘드시죠. 서로 인사들 나누시고, 천천히 하세요. 오늘 다 못 하시면 다음 주말에 와서 하셔도 되죠. 급할 것 없습니다.”
‘느리게 살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산업화·도시화에 이어 지난 세기말부터 밀어닥친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은 인간의 생활을 더욱 바쁘게 만들었고, 그것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자각의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바탕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것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속도 지상주의(至上主義)’에 대한 거부감이다. 빠르게 사는 것이 더이상 미덕(美德)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2000년 여름 독서계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피에르 상소 지음·동문선)라는 한권의 번역서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빈둥거림·권태·기다림의 여유를 가질 것을 권유하는 이 책은 도시 생활을 이겨내는 지혜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또한 자연의 시간 흐름과 함께 함으로써 과속(過速)을 강조하는 현대 문명을 거부하려는 귀농(歸農)에 대한 관심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한편 이런 꿈이 ‘그림의 떡’일 수 밖에 없는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요즘 현실적인 대안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이 주말농장이다.
벤처기업 ㈜에코필에 다니는 홍순명(40)씨는 가족에게 할당된 땅으로 내려가 다시 땅을 골랐다. 아빠를 따라 나온 두 딸은 모닥불서 장난을 치다가, 아빠를 돕다가, 왔다갔다 노닐었다. 올해 처음 주말 농장에 나왔다는 홍씨는 “아이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신청했는데, 막상 나와 보니 내 자신이 직장에서 일할 때의 바쁜 리듬을 잠시라도 잊게 되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작년부터 이곳을 찾는다는 김의숙(30·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씨는 “주부로 집에서 일하는 것도 직장 생활하는 남성들이나 마찬가지로 정신없고 바쁜 일”이라며 “이 곳에 나오면 뭐든지 서두를 필요가 없어서 좋다”고 말했다.
이들 초보 농사꾼들을 옆에서 돕고 있던 안병덕(48) 귀농운동본부 부본부장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움’을 강조했다. 2년 전까지 정보통신업계에서 일했던 안씨는 “친구들이 놀러 오겠다며 ‘언제 가면 되느냐’고 시간 약속을 물으면, 그냥 아무 때나 오라고 대답한다”고 말했다.
‘느리게 살기’와 관련, 최근 전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슬로우 푸드(Slow food)’ 운동이다. 햄버거나 샌드위치로 대표되는 패스트 푸드(Fast food)는 속도와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 음식. 따라서 만드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전통 음식을 먹자는 슬로우 푸드 운동은 단순히 올바른 음식 문화를 보급하는 차원을 넘어서 삶의 속도를 늦추려는 시도이다. ‘슬로우 푸드 운동’은 1986년 대표적인 패스트 푸드인 맥도널드 햄버거의 로마 진출에 반발하여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전통음식의 보존을 내걸고 시작된 이 운동은 전세계로 확산돼 현재 40여개 국에 7만 명의 회원을 갖고 있다. 슬로우 푸드 운동가들은 1989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모임을 갖고 ‘슬로우 푸드 선언문’을 채택하고 달팽이를 심볼로 선정했다. “산업문명의 전개 이후 우리는 기계를 생활의 모델로 삼고 속도의 노예가 됐다. 인간이 종(種))이 소멸되는 위험에 처하지 않으려면 속도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은 슬로우 푸드 식탁에서 시작된다”는 선언문은 이 운동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슬로우 푸드 운동’을 한 걸음 발전시킨 것이 ‘슬로우 시티(Slow city) 운동’이다. 2000년 7월 역시 이탈리아의 그레베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32개 도시가 참여하고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도시들은 자동차 추방, 경음기 사용 금지, 자전거 권장, 보행자 구역 확대 등 시민들의 삶의 속도를 늦추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슬로우 푸드 운동가들은 우리나라 전통 음식의 80% 이상이 김치·된장·젓갈 등 발효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언제라도 돌아가 쉴 수 있는 산과 들이 가까운 곳에 있고 유장하게 살아온 문화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기에 슬로우 운동에 어느 나라보다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슬로우 푸드에 관한 홈 페이지(www.slowfoodkorea.com)를 개설하며 소개에 앞장서고 있는 김종덕 경남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근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빨리 빨리’를 강조했고 그 것을 통해 많은 것을 성취했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며 “이제는 광기적인 속도나 경쟁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느린 사회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Slow Food 선언문 (1989년 11월 프랑스) 속도가 가정과 사회생활을 망가뜨리고 있다
산업 문명의 훈장 아래서 시작되고 전개된 우리 세기는 처음 기계를 발명했고, 이후 그것을 생활의 모델로 삼았다. 우리는 속도의 노예가 되었으며, 모두가 동일한 음흉한 바이러스에게 굴복했다. 그것은 우리의 습관을 망가뜨리며, 가정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우리로 하여금 패스트 푸드를 먹도록 만드는 ‘패스트 라이프’(빠른 생활)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에 값하기 위해서 우리는 속도가 우리를 소멸의 위험에 처한 종(種)으로 만들기 전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빠른 생활이라는 보편적인 어리석음에 반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물질적 만족을 조용한 방법으로 얻도록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미 보장된 감각적 즐거움과 느리며 오래 지속되는 기쁨을 적절하게 누리는 방식으로 우리는 광기를 효율성으로 잘못 알고 있는 다중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방어는 ‘슬로 푸드’ 식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각 지역 요리의 맛과 향을 다시 발견하고, 품위를 낮추는 패스트 푸드를 추방해야 한다. 생산성이란 이름으로, 빠른 생활은 우리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켰고, 우리의 환경과 경관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유일하면서도 진정하게 진취적인 해답은 슬로 푸드이다.
진정한 문화는 미각을 낮추기보다는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데는 경험·지식·프로젝트의 국제적인 교환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슬로 푸드는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 슬로 푸드는 그것의 상징인 작은 달팽이와 함께 이 느린 움직임이 국제적인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많은 지지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